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襌: 참 스승들 — 감정들, 그리고 느낌들

선 수행의 스승이나 선배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는 수련생들을 대하는 것은 참 재밌는 일입니다. 때때로 수련생들은 저나 아니면 다른 경험이 많은 지도자들이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모습을 볼수도 있습니다. 그런 감정은 뭔가 잘못된 상황에서 겪는 좌절이나 , 순간적으로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겪는 스트레스, 슬픔, 일주일 내내 어항처럼 좁은 선 센터에서 생활하며 휴식이나 릴렉스가 필요할때 드러나곤 합니다. “스트레스를 왕창받는” 것은 아주 오래전 카톨릭 수녀들과 사제들에게서도 봐 왔던 것으로 나는 기억합니다. (제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카톨릭 사제였던 삼촌이 미식축구 중계를 보다가 중요한 경기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에 패스를 놓친 선수 때문에 엄청나게 화를 내는 것을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 무릎을 치고, 이를 닥닥 갈며 화를 내던 삼촌의 모습은 몇 년 동안이나 마음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젊은 수련생들이 이런 문제를 접할 때 어떻게 생각할지는 참 궁금합니다. 그들은 높은 지도자나 스승이  스트레스를 겪거나 강한 감정적 반응을 보일 때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물론, 스승이 수업 중에 그런 일을 너무 자주 하거나, 특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던가, 그게 습관적으로 반복된다면 확실히 걱정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경험한 지도자들도 결국 인간입니다. 그들도 심한 요즘 세상의 정보 급류와 너무 복잡하게 서로 얽힌 상황들 속에서 인간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스승이셨던 대선사님이 엄청 화나고 스트레스를 받으셨을 때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몇 분 동안 그 분은 소위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은 그 정도 경지에 계시는 분께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 나는 차차 알게 됐습니다. 그런 감정의 표출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며, 그 감정에 계속 얽매여 있지 않고 “제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내가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이 일이 있기 전에는 스승님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뵙지는 못했습니다. 이 경험이 나의 지도자 생활과 수행에 스며들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분명 나에게 수련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었고, 고통을 받고 있는 타인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게 되는데에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풍경  1  – 숭산스님 일화 

1992년 10월, 미국 프라비던스 선원에서 큰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날 제자들이 독립된 선 마스터로 자격을 받는 것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하객들이 모였습니다. 그날은 마침 관음선종 20 주년이기도 했기 때문에 행사,법문,회의,추모식등의 일정이 매우 빽빽했습니다. 한국과 유럽, 미주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대선사님은 언제나 친절하고 좋은 호스트였습니다. 그런데 회의와 인사가 끊이지 않았고 , 자유를 사랑하고 전통에 무지한 아주 멀리서 온 서양 학생들을 돌봐주느라 스님은 예식 며칠전부터 쉬지를 못했습니다. 또한 불교계와 전통 기독교에서 오신 많은 지위 높은 승려, 성직자들이 참석했으며, 각각 자신의 측근과 지지자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야만 했습니다. 대선사님이 대표적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의 하나는 “세심함”, 타인을 위해 명확히 작동하는 “세심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1992년 10월에 열린 이 의식은 대선사님의 핵심교리와 언행을 사찰에 잘 접목하여 한국 불교에 얼마나 성공적으로 전수했는지를 ( 그때까지는 )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았습니다. 제도, 기능과 모든 요소들을 정말 잘 융합시키셨습니다. 1,700년 된 한국불교의 그릇을 서방에 전하는 만큼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아낌없이 지원해 온 이들에게 ‘ 좋은 인상 을 심어줘야 한다 ‘는 부담도 상당했습니다.

오전 염불 때 저는 대선사님 옆에 서서 도와드리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맡은 일들” 중 하나는  대선사님이 중앙의 석가모니불 염불을 리드해 나가실 적절한 때에 목탁을 건네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승려가 된지 한달도 안 된 초짜였기에  이 일은 정말 대단한 특권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또한 늦게 온 사람들을 법당의 적당한 자리에 앉히는 임무도 맡았습니다. 나는 그분의 얼굴을 코앞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그분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었던 것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영광, 어쩌면 인생 최고의 영광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느낌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법당은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2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보시물을 드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습니다. 그 느낌은 감전된 것처럼 충격적이었고, 동시에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만화경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큐 사인에 따라 나는 반절을 드리고 제단앞으로 걸어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목탁을 집어들고, 다시 돌아서서  선사님을 향해 몇발자국 걸어가 반절을 하고 목탁을 드렸습니다. 평소에 집중력이 매우 뛰어난 분이셨지만, 그 분이 의식을 진행하는 사람들에게 큐 사인을 주고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뚫어지게 보고 계시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몇 초 안에 대선사님은 염불을 인도하셨습니다. “석가 모니 불, 석가 모니 불, 석가 모니 불…!!!” – 그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호랑이 같았습니다. 이 한번의 염불을 위해 그는 목탁을 직접 쳤습니다. 아마도 경험이 아주 많은 사람이 지금의 이 전통적인 번영과 영향을 직접 다루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대선사님이 염불을 하는 동안  선사님옆 가장 가까운 문으로 나이드신 한국인 보살님들이 안으로 들어오느라고 문이 계속 열렸다 닫혔다 했습니다. 일종의 아름다운 혼돈이었습니다. 방문객들의 좌석은 아주 신중하게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처럼 위계질서가 중요한 문화에서는 외교적인 문제처럼 세세하게 자리 배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그게 다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지런히 늘어놓은 방석들은 엉클어지고, 사람들이 제단에 보시물을 바치러 올라와 세 번 절을 하는데, 염불하는 사람들 앞에서 마구잡이로 해버리고, 제단 위에 가지런히 세워 놓은 꽃다발은 자기것을 눈에 띄게 놓고 싶어하는 과일 바구니에 밀려 쓰러지고, 촛대의 초를 들어내고 자기가 사온 걸 올려 놓으며 개인적인 소원이나 기도를 드리는 불자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보살님들은 대개는 나이가 많으셨고, 사찰의 의식에 대한 경험도 제각기 다양하셨는데, 심지어는 문 드나드는 자리에 서서 남들이 비집고 다니기도 힘들게 팔을 길게 뻗어 절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가을이었는데도 분위기는 꼭 사우나탕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와중에 여러 사람들아 행사 진행에 관한 급한 일들을, 염불을 하고 계신 대선사님의 귀에 대고 묻기도 했습니다. 어떤 한국 보살님들은 염불하는 스님 바로 앞에서 삼배를 하기도 했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것은 대선사님의 육체와 영의  중심으로부터 폭발하는 불심의 번잡한 회오리 바람이었습니다. 제법 지위가 높은 승려나 수녀도 수시로 드나들어서 서양에서 온 수련생들이 방석을 다시 놓게 만들었습니다. 온갖 어려운 외교적 결정까지 즉석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미친짓이었습니다!

풍경 2 –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진짜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대선사님이 염불 중간에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소리쳐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주변이 하도 시끄럽고 염불소리가 크다보니 대선사님의 말씀이 돕고 있는 스님과 비구니들께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시사항을 하도 짧게 얘기하셔서 원하신대로 이행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대선사님은 질서와 무질서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였다가 흩어지고 춤추듯이 난리치는 폭발하는 불심을 담아 멸절의 막대기로 어느 방향을 지목하시며 뚫어져라 쳐다보셨습니다.

대선사님의 시선은 어느 지점에 모였고, 소음 속에서 여기 저기 고치라고 짐승처럼 소리치셨습니다. 커다란 황금 촛대가 이미 가득찬 제단 속으로 자기의 흰 쌀자루를 밀어 넣고 있는 한국인 할머니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 처럼 아슬아슬했습니다. 큰 향로에서는 엄청난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지만, 그 주위에 몰려든 나이든 여인들은 새 향을 자꾸 더 꽂아서 바로 아래에 쌓여 있는 프로그램 안내문에 거의 화재를 일으킬 뻔했습니다. 아무도 그 걸 못봤지만 독수리는 보았습니다. 그 분은 날카롭게 그 무엇하나 놓치지 않고 계셨습니다.

나는 진짜 분노의 섬광을 보았습니다!

그 선방에는 염불, 신앙, 사상으로 북돋움을 받은 수 많은 정신 세계가 충돌하여 그 즈음에는 거의 완전한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대선사님의 천재적인 능력과 경험, 번득이는 지혜만이 행사를 지탱했을 뿐이억 습니다. 그 때 갑자기 어떤 높으신 한국 스님들이 법당에 들어왔는데, 그 분들이 앉을만한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점령해버린 뒤였습니다. 대선사님은 워낙 전통과 보살심에 익숙했기 때문에 특히  그 먼 아시아에서 부터 오신 스님들이 느끼셨을 법한 당혹감이나 원망 또는 모욕감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래서 뭔가 다른 앉으실 자리가 없는지 둘러 보셨습니다. 염불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대선사님은 늦게 도착한 VIP 에게 합당한 자리를 마련하라고 현장 스태프 중 한명에게 소리를 질러 지시를 하셔야만 했습니다.

원래 염불할 때는 앞을 봐야 했지만, 나는 대선사님을 옆에서 모시는 영광스런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그 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발견한 한 장면은 나의 창자를 끊어내는 것처럼 고통 스럽고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대선사님의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습니다. 눈은 눈두덩이를 꽉 채울만큼 부릅떠졌고, 이마는 찌푸려 졌습니다. 대선사님은 이제 중요한 일이 제대로 안되는 것을 보고 화가 막 폭발할 참이었습니다. 입술은 떨렸고 볼과 얼굴의 근육도 덜덜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지시사항을 엄청나게 날카롭고, 너무나 급박하고, 엄청나게 화가나서 짐승처럼 외치고 계셨습니다. 이따금 얼굴에 사나움이 번뜩이기 까지 했습니다.

저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던게 기억납니다. “대선사님이 정신을 잃으실지도 모르겠어, 근데 그게 말이 돼?”

대선사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치명적인 실수가 반복될 때마다 오래전 군대에서 하시던대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셨습니다. “야, 너 왜 그거 안해?” 대선사님은 한번 말씀하신 걸 머뭇거리고 있는 서양 히피 수행자에게 거듭거듭 따지셨습니다.

풍경 3 –

저는 지금까지 대선사님 같이 마음을 비우시고 자아를 내려 놓으시고, 부족함이 없는 완전함, 저는 또 다시 태어나도 안 될 것 같은 경지에 이른 분이 저토록 심하게 경로를 이탈하신다는 것은 생각해본적이 없었습니다. 대선사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오, 석가모니 부처님!” 이란 염불을 외우시는 중간 중간에 아이러니 하게도 부처님스럽지 않게 짖어대고 계셨습니다.저는 마치 저의 이상향이 부서지고, 상하는 것 같은 실망이 느껴졌습니다. 대선사님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망가지기 직전에 이르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습니다!

마침내 염불이 끝나고 다들 한국음식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내려가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줄을 섰다기 보단 뒤엉켰다고 보는게 더 맞습니다. 그러나 나의 충격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자비심의 경지에 이른 분이 어떻게 남들과 똑같은 감정과 좌절에 휘둘릴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막 같은게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느낌은 내가 읽은 모든 선과 선 수련자에  관한 책의 내용들과 모두 일치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대선사님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드러낸 일은 또 있습니다. 한 번은 대선사님이 차에 타고 있는데 북한 공안국의 비밀 요원들이 뒤를 따라왔을때 입니다. 대선사님은 서양 수련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냉정을 잃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온 이 요원들에게 쫓기는 극도의 피로와 긴장으로 몸을 움츠리셨습니다.

배경설명: 대선사님은 1978년 유럽에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초청은 공산주의 통치 아래있는 국가 ( 폴란드 ) 에서 였고, 그는 여러 공산주의 국가 (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러시아 ) 에서 자주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북한의 수도인 평양 출신인 대선사님은 집단사회에서의 이러한 실험이 인간의 정신에 가해졌을 때 대규모로 일어난 인간관계의 잔혹한 단절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조국은 20대 초반까지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니었지만, 1950년 한국 전쟁 후 국경이 그어진 이후 , 대선사님은 고향을 다시는 방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부모님을 다시 뵙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북한의 공산치하가 어떤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고, 심지어는 부모님들이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분들 같은 지주들이 끌려갔던 노예 노동 수용소에서 삶을 마감하셨을지도 모를일입니다.

풍경 4 –

바르샤바의 한 대학에서 강연을 하던 어느 날 저녁, 서양 학생들은 관광 사업이 없던 70년대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서너 명의 동양인 남성들이 나타나곤 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강의실 뒤에 서서 뭔가 메모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제자들이 스승님을 어떤 제자의 아파트에 있는 숙소로 모셔다 드릴 때 그 동양인들이 내내 뒤를 따랐습니다. 대선사님은 그 상황에서 냉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몇일 밤 동안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 아무런 생각없이 무지몽매하게 운전만 해대는 폴란드 제자들에게, 대선사님은 한순간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 길로 가! 자 이젠 여기로 가!”  “ 근데 스승님,  이 길은 숙소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대선사님은, “묻지마!  그냥 이길로 쭉  가!  이젠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돌아!” 스승님은 분명히 뭔가 약간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이 같은 형제인 이북 공산당 요원들이 당신이 탈북한 고위층 인사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걸 염려 하신겁니다.한번은 1980년대 초, 대선사님이 처음으로 서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제자들이 베를린 장벽 너머 동베를린까지 볼 수 있는 높은 플랫폼인 체크포인트 찰리 ( Checkpoint Charlie )로 모셔갔습니다. 대선사님을 초청한 미국에서 온 몇몇 제자들과 베를린 현지 제자들은 대선사님이 공산주의 사회를 “관찰” 할 수 있게된 이 드문 기회를 갖고싶어 하셨던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그것이 피상적인건비 미미한 것인지 한껏 들떠있었습니다.

대선사님은 자연스럽게 제일 먼저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이르렀습니다. 대선사님 앞에는 동베를린의 칙칙한 회색 건물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추운 거리에는 사람의 움직임도 없었고, 놀거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열린 카페도, 쇼핑하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이 순간 서양 제자들은 감동했습니다. 20세기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침묵이 흘렀습니다.

몇 분이 흐른 후, 다른 사람들과는 좀 떨어져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입술로 웅얼거리면서 확실히 대다라니를 읊고있는 대선사님께  독일 제자 한명이 돌아서서 뭔가를 여쭤봤습니다. 그 제자은 대선사님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의식의 영역에 도달하신 이 위대하고 경의로운 스승님이 소리 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 제자는 나중에, 자기가 이 모습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말했습니다. 다른 몇몇 제자들도 역시 그 모습을 알아차렸습니다. 제자들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그 소중한 순간에 참가했던 매우 운 좋은 사람에게 나중에 들었습니다.)

위대한 선스승님, 삶과 죽음을 초월하신 분이 울고 계셨습니다.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후, 전망대를 나와 함께 식사를 하던 중 , 한 제자는 그가 겪었던 혼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대선사님께 질문을 해도 되겠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항상 ‘ 삶’ 과 ‘ 죽음’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와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동’, ‘서’, ‘남’, ‘북’은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마음은 근본적으로 자유롭고 이미 완전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요?” 대선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그런데요, 대선사님, 방금 눈물 흘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슬프셨습니까? 고통스러우셨습니까? 왜 그러셨는지요?”

대선사님은 “네, 거기 서서 동베를린을 바라보고 동독을 바라보며 내 조국을 생각했습니다. 내 조국도 역시 분단되고 가족이 흩어졌습니다. 많이 고통스럽죠. 이 독일인의 고통과 나의 조국의 고통은 같은 고통입니다. 독일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하니 나의 마음도 슬픕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투명한 거울과 같습니다. 커다란 둥근 거울은 물체를 반사할 뿐입니다. 빨간색이 들어오면 빨간색이 나타납니다. 흰색이 들어오면 흰색이 나오죠. 누군가가 슬프면 나도 슬픕니다. 아시겠죠?  그래서 내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곧 지나갑니다. 지금 우리는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아주 즐거운 경험! 이제 이 경험만 남았습니다. 거울 앞에서 빨간 공을 들고 있으면 빨간색이 나타납니다. 흰색 공을 들고 있으면 흰색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공들이 거울 앞에서 사라지면 빨간 공도 흰공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감정과 생각이 이와 같습니다. 이것이 무지한 마음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대선사님의 위대한 자유였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 모두에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들 입니다. 우리가 그걸 누리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하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혼돈과 스트레스가 있으면 스트레스가 나타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슬픔이 오면 슬픔이 드러날 뿐입니다.

저는 가르치기도 했지만 여러 해 동안 많은 스승님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선 ( 襌 ) 교사, 비파사나 교사, 요가 교사, 그리고 여러 심리 치료사들과 의사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고통받는 세상속의 인간적 경험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들이 어떤 말이나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나는 한 저명한 요가 강사가 어느 날 아침 훈련 후에 항상 경직되어 있는 그녀의 남편과 남들이 다 보는데서 언쟁을 벌였을 때, 학생들이 충격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남녀 수련생들은 모두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요가 선생님이 남편과의 열 받는 대화 후 친구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며 다들 수군거렸습니다.

한국에서 내 명성이 폭발적으로 알려진 후, 상상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몇 해 동안 짊어져야 했습니다. 모두가 어려운 요청을 하거나 승가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불만을 “ 설명 “ 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강하고 명확한 태도로 대중의 기대에 부응해보려고 했지만, 충족되지 않는 기대와 요구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공적 필요와 사적 필요 사이에서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한 순간도 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한편, 내가 조금만 잘못 판단을 해도, 선 수련생들은 ‘선/襌’ ‘만이 완전 완벽히 체험되는 것이라 믿있고, ‘선‘ 으로 얻을 수 있는 자기 해방의 방법론에 대해 너무 깊고 깊이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청 고통스러워하고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나도 때로는 냉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온 사방에서 밀려오는 끝없는 무게에 짓눌려 구겨진 때 조차도, 공개 연설과 사전에 잘 맞춰진 선수련을 할 때처럼 모든 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 기간 동안 완전히 탈진했습니다.

더 나은 통찰을 얻기 위해 그러한 상황에서 약간 벗어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심한 스트레스 속에 있을 때는 내가 가르치는 것처럼 실제로 살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중독의 경향이 있는 가족의 삶, 최근에야 잔인한 진실로 직면하게 되었던 어린 시절의 깊은 트라우마들이 인간적으로는 아직 어딘지 잘 모르겠는 내 마음의 어떤 영역을 불같이 지져대고 있었습니다.

화계사에 승려로 있을 때, 일상 속에서 대선사님을 뵙는 시간이 참 많았습니다. 그 시절, 그 분을 모시던 서양 출신 비서이자 수행원은 말수가 적고 무례하고 부주의했지만, 극도로 근면하고 헌신적인 미국인 승려였습니다. 이 스님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고, 예절이 그렇게도 중요한 이 한국 문화속에서 좌충우돌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대선사님은 한국 불교사회에서 이미 너무 많은 존경을 받는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거의 대부분이 몰라서 저질러졌던 그 스님의 작은 실수조차도 교훈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극심한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풍경 6 – 

대선사님은 당시 세계적인 선 센터 네트워크의 리더였습니다. 그 분은 분명 본인 스스로의 자기 해방에 대해선 확신이 있으셨지만, 당신의 보살 정신이 최대한 많은 냉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선 수련법을 전수하라고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여러 나라의 선 공동체에서 늘상 발생하는 제반 문제를 24시간 내내 해결해야 했고, 곤경에 처한 여러 나라의 센터에 자금을 지원해야 했으며, 수련의 질 관리 등의 행정적인 요구가 매일같이 쏟아졌습니다. 그 중 제일 어려웠던 것은 한국의 언론, 정치 엘리트들의 끊임없는 상담, 인터뷰, 조언, 번득이는 영적 결단에 대한 요청이었습니다.

때로 그 분은 그 불쌍하고 멍청한 안타까운 비서에게 고함을 지르셔야 했습니다. 대선사님의 선센터를 금전적압박에서 구해준 서양의 어떤 후원자에게 이 비서가 제대로된 감사의 인사조차 못한다던가, 결혼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며느리를 데리고 사찰까지 왔는데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끝도 없었습니다. 비서 승려님의 마음은 착했지만, 스승님을 잘 모실 능력은 도저히 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놀라운 유교적 문화 전통으로 인해 그런 분들께 조차 낙제점을  줄 수는 없습니다!

비서 스님에게 체벌이 내려졌을때, 스승님의 초라한 숙소 밖 정원에서 일하고 있던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동정심으로 꽤 움찔했었습니다. “당신은 조언을 구하러 온 여자분께 매우 무례했습니다. 그 분이 울면서 가셨쟎아요. 그 분의 가족이 우리 선원을 얼마나 많이 도와주시는지 모르세요?” 그러나 체벌이 아무리 셌어도 뭔가를 들고 때리시진 않았습니다. 폭풍우 같은 시간이 지나간 다음, 하늘은 완전히 다시 맑아졌습니다. 비서 스님이 아무리 심각한 실수를 하셨더라도 회초리를 든 적은 없으셨습니다. 이 불쌍한 비서 스님의 그 뻔한 헛발질과 까무라칠 행동에 사원 사람들이 거의 다 질려버린 후에도 대선사님은 수년 동안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비서 스님에게 체벌이 내려졌을 때. 스승님의 초라한 숙소 밖 정원에서 일하고 있던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동정심으로 꽤 움찔했었습니다. “당신은 조언을 구하러 온 여자분께  매우 무례했습니다. 그 분이 울면서 가셨쟎아요. 그 분의 가족이 우리 선원을 얼마나 많이 도와주시는지 모르세요?”

나는 영적인 스승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너무 과한 기대를 하는 분이 계시다면 , 그런 생각을 버리시란 의미에서 이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토록 성스러웠던 달라이 라마 조차도 제자들에게 화를 종종 냈었느라고 여러차례 인정했었습니다! 여러분이 젊은 시절 엄격한 수련을 받아 깊은 통찰력을 얻거나 , 그 메시지를 소음과 혼란이 가득한 세상속에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을만큼 상황이 항상 완벽할 수 만은 없습니다. 복잡한 상황과 인간 관계 이런 것들 때문에 깨달은 대로 항상 세련되게만 행동할 수는 없게 만듭니다. 이것은 인터넷 유비쿼터스 시대, 초연결 통신 환경에서 시시각각 바로 바로 돌진하듯이 전달되는 SNS 환경에서 특히 더 어렵습니다. 나는 공개 강연을 하면서 추운 겨울의 불당에서 세 겹의 옷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다르마의 미묘한 부분까지 열성적으로 설파하면서, 그런 위태 위태한 상황을 이기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을 기억합니다! – 저 높은 설법좌석에서 내려오는데 핸드폰을 바다와 같이 많이들 들고 사람들이 사진을 같이 찍자고 서로 저를 잡아 당겼었습니다. 선 수련에 대해서 정말 어려운 질문을 갖고 온 사람과 집중해서 대화를 하고 있는 중에도 수시로 사람들은 제 소매를 끌어 당겨서 얼굴을 쳐들고 셀카를 같이 찍자고 했었습니다. 한명이 찍고 나면 그 다음 사람이 더 세게 저를 잡아 당기곤 했습니다.

특히 이 인터넷 시대에 더더욱 어렵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온 사방에서 동시에 뭘 해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 스님이 대선사님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떤 한국 사람들이 저에게 불평을 합니다. 왜 좀 더 침착하고 정확하게 하지 않느냐고요. 사람들이 또 이런 말을 한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대선사님은 망설이지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꼭 이렇게 대답해라. “내가 왜 이렇게 됐겠습니까?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열받은 겁니다.” 하하하하하, 지금 시대를 위한 꼭 맞는 가르침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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